23세 태화 이현상(李顯相)의 자(字)는 상지(相之)이고 호(號)는 태화(太華), 본관은 우계이다. 문과방목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경(京, 한성)이라 되어 있으나 실제 출신지는 경기도 포천군이었다. 그의 고조부 이상우(李商雨)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지금의 성남시 대장동, 서울시 서초구 원지동, 내곡동 일대)에서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우계이씨 세보와 1984년 갑자보, 1999년 무인보상에는 生員庚申文科及第 通訓大夫新昌縣監文川郡守 安邊鎭管兵馬同僉節制使 贈 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 弘藝文館提學 五衛都摠府副摠管이라고 간략하게 등재되어 있다. 경신년(1800년)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신창현감, 문천군수 안변진관 병마동첨절제사를 지내고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제학 겸 예문관제학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되었다는 뜻이다.
출생
이현상은 1770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유학(幼學) 이한운(李漢雲)과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동지중추부사 박성희(朴聖希)의 딸이며, 참판 박상빈(朴尙彬)의 4대손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날 무렵까지는 관직이 없던 유학이었다. 이는 이현상의 사마방목 입격을 보면 아버지 이한운의 직책이 유학으로 나온 것에서도 확인된다.<사마방목 이현상 입격 기록 참조> 후에 아버지 이한운은 음보로 출사하여 장사랑을 거쳐 승사랑에 이르렀다.
태화 이현상이 태어날 무렵 그의 아버지는 유학이었다. 그러나 후에 그가 성인이 된 뒤, 아마도 이현상이 문과에 급제한 뒤 어떠한 연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음서로 출사하여 장사랑이 되고, 최종 관직은 승사랑에 이르렀다. 족보에 등장하는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은, 한운의 손자 그러니까 태화 이현상의 아들 이기령(李驥寧)이 노인직으로 자헌대부 지중추부사가 됨으로써 아버지, 할아버지를 추증하는 전례에 따라 추증된 것이다. 그 역시도 사후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증직되었다.
선조들
이현상은 우계이씨 시조 좌복야 이양식(이하 존칭 생략)의 23세손으로, 국자대사성을 지낸 이순우(李純祐)의 22대손이며, 조선의 개국공신 이억(李山+疑)은 15대조였다. 시조 양식은 본래 신라 개국공신 알평의 48세손이자 거명의 13세손으로 포윤을 역임한 이선용의 차남이다.
2세 이순우는 고려 의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명종 때 병석에 누운 공예왕후의 기도문을 지어 명종의 총애를 받아 한림학사, 국자좨주, 간의대부 등을 지냈다. 과거 시험의 주관자가 되어 의종 때는 채보문 등을 뽑아들이고, 명종 때는 홍경 외 28인을 뽑아들였다. 또 팔관회와 연등회에 쓸 다락죽을 너무 많이 짜낸다고 농우를 아낄 것을 청하여 백성들을 감열시켰다. 순우는 국자대사성, 보문각대제학을 지내고 금성군에 봉군되었으나 1196년 3우월 최충헌의 난에 살해되었다.<고려사, 고려사절요, 임영지, 남공철의 고려명신전> 이순우는 그의 선조들 중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순우의 부인 기록은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
이순우에게도 부인과 자녀가 있었을 것이나 그러나 1196년 이순우가 최충헌에게 살해당하고, 일부는 향족으로 몰락하고 무신집권기의 혼란으로 상세한 기록은 실전되었다.
이순우의 아들 적(李迪)은 우계 호장이었고, 강릉 해령산에 10년간 은거했다 한다. 적은 홍준과 향공진사 공용(公用)을 낳고, 4세 이홍준(李洪俊)은 중윤과 호장을 지냈으며, 5세 이구(李球)는 처음 이름이 옥(沃)으로 후에 구로 개명한 것이다. 이구는 18세 때인 1282년 원나라에 들어가 쿠빌라이칸이 주관하는 제과에 합격하고 돌아와 예빈시승과 예빈시경동정에 이르렀다. 그가 지었다는 시 2수가 현재 삼척 죽서루에 전한다. 국조인물고의 이경항 묘갈명, 충장공 복남의 시장(19세 송곡 이서우 작) 등에 그의 이름이 나타난다. 이구는 삼척심씨 장사랑 양온령동정 심윤의(沈允義)의 딸과 결혼하여 이백경과 이천승(李天升)을 낳고, 이백경(李伯卿)은 영동정을, 백경의 아들 이사성(李思誠)은 밀직대부를 역임했는데 이들의 묘소는 실전되었다. 이사성은 영양남씨, 의령군 남군보(南君輔)의 4대손 요동지휘도통사 남성로(南星老)의 딸과 결혼하여 퇴은 억을 낳았다.
8세 퇴은(退隱) 이억(李山+疑)은 자는 신지(信之) 호는 퇴은으로,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유장으로 강계원수 재직 중 1388년 제1차 요동정벌 시 이철성원수 홍인계와 함께 선봉으로 요동에 쳐들어가 요동군의 수급을 베어와, 그 용맹으로 우왕이 친히 금정아(金頂兒)와 무늬 비단을 하사받았으며, 밀직부사에 이르렀다.<고려사, 고려사절요> 그뒤 조선 건국 후 이태조는 예전의 부하인 억에게 중추원부사 겸 도평의사사사 의흥친군위동절제사를 내렸지만 억은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여 벼슬을 거절하고 소백산으로 가서 은거하였다.<여말충의열전, 우계이씨 세보>
퇴은 이억이 태조 이성계가 내린 식물과 전답, 관직을 모두 거절하고 쌓아두었다 하여 순흥에는 구두들이라는 별칭이 붙은 지명이 구전되기도 했다.<순흥지역 전설> 퇴은 억은 순우, 구 이후 고려사, 고려사절요라는 공식 역사서에 이름이 드러난 인물이다. 그는 이태조의 청을 끝내 거절했지만 개국원종공신일등(開國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내내 후손들은 그가 관직을 사양한 것보다는 개국원종공신에 녹훈된 것을 강조하고 평의공이라고 불렀다. 이억은 순흥안씨 삼사사 좌윤 안영부의 딸 중 한 명을 취하여 아들 이만(李蔓), 직장 이원길(李原吉)을 두었다.
9세 이만은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랑장, 홍로부사, 인진사를 지내고 중추원부사에 이르렀는데, 1392년 조선 건국 이후 갑자기 관직이 강등당해 봉렬대부 호분위경력이 되었다가 검찰부사에 이르렀다. 사후 증직으로는 판중추부사를 받았는데<무보>, 이는 무보에 나타난 것이다.
이만은 경주정씨와 결혼했는데, 경주정씨는 조선의 개국공신 문하좌정승 계림부원군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의 딸이며, 문하시중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충경공 염제신(廉悌臣)의 외손녀였다. 고려말의 권신 서성군(瑞城君) 염흥방(廉興邦)이 부인 정씨의 외삼촌이 된다. 만은 부인 경주정씨와의 사이에서 인숙과 딸 하나를 뒀는데 딸은 민무휼에게 출가했고 딸 1명을 낳으니 청송심씨 심준에게 출가했다.
10세 이인숙(仁淑)은 음서로 출사하여 사정, 중추부 경력을 거쳐 1421년 지덕천군사로 부임하였다. 그가 사정을 역임한 것은 해주오씨 문중에 그의 장인 오부(吳傅)에 대해 문의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10세 인숙이 지인천군사를 지낸 오부의 딸 해주오씨와 결혼할 당시 관직에 있었고, 당시 관직이 사정이었던 것이다. 이후 중추부 경력을 거쳐 지덕천군사가 됐는데, 인숙이 지덕천군사로 부임하여 세종임금에게 사은숙배를 하고 떠난 기록이 세종실록에 나타나 있다.<세종실록> 그 뒤 판사복시사에 이르렀다.
이인숙의 배위 해주오씨는 지인천군사, 가의대부 행대호군을 지내고 증 정헌대부 호조판서 겸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에 추증된 오부(吳傅, 호는 덕암산인(德岩山人))의 딸로, 할아버지는 호조판서 제조군자감사 휘 성식(成式), 증조부는 찬성사 문경공(文敬公) 휘 반(潘)이며, 오연총의 후손이다. 외할아버지는 경주이씨로 좌의정을 지낸 청순공(請順公) 이성중(李誠中)이다.
10세 이인숙은 해주오씨와의 사이에서 직장 봉렬대부 군자감주부 경창(景昌), 소위장군 행충무위 부사정 호군 경연(景衍, 일부 문헌에서는 경행(景行)으로도 전한다.), 사정 경생(景生, 기록이 실전되었고 아들 곤이 감역을 지내고 황해도 연안에 낙향, 이후 그 후손들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과 봉렬대부 군자감 주부 경화(景華, 사과공파의 파조로 경화의 후손들은 생몰년 등 기록이 비교적 상세히 전한다.) 등의 아들들과
진주인 참판 류자문(柳子文, 문과에 급제 좌익원종훈)에게 출가한 딸, 부사 이승정(李承請, 본관 미상)에게 출가한 딸, 청송인 심준(沈濬)에게 출가한 딸이 있다.
이 중 11세 이경연(李景衍)이 그의 12대조가 된다. 생전 대표적 관직은 소위장군 행충좌위 부사정이라 하여 부사정공이라 부르며<우계이씨 세보>, 무보에는 그의 관직이 호군으로 등장한다.<무보> 사후 증직은 통정대부 형조참의인데 이는 손자 이지방(李之芳)의 출세로 증직된 것이다. 경연은 강원도 강릉에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현재의 성남시 대장동과 서울시 서초구 원지동, 신원동, 내곡동 일대)로 이사와서 정착했는데, 이후 경연의 후손들 중 다수가 현달하여 조선왕조실록,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승정원일기에 이름을 드러냈다. 경연은 교리 남숙문의 딸 의령남씨와 결혼했으며, 징(徵)과 숭(崇)을 두었다. 의령남씨는 교리 남숙문의 딸, 참지문하부사 사천백 남을진(南乙珍)의 증손녀이다.
12세 이징(李徵)은 자는 헌부(獻夫)이고 군관으로 충찬위(忠讚衛)에 오래도록 복무했는데 이는 성종실록에 기록이 나타난다. 이징의 딸 한명이 아들이 없던 하동정씨 하동부원군 정현조(鄭顯祖)의 후처가 되어 부호군 정승수, 장사랑 정승영, 사헌부 감찰 정승장, 정승화, 정승란, 정승무, 정승범, 사역원정 정승온, 예빈시첨정 정승동 등의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공주의 부마는 재혼을 금지했으므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문제로 12세 이징과 정현조를 탄핵한 기사가 등장한다.<성종실록, 중종실록>
12세 이징은 양천허씨 사헌부장령 허적(許迪)의 딸과 결혼하여 지방(之芳), 지영(之英) 등과 하동정씨 정현조에게 출가한 딸, 이오에게 출가한 딸, 파평윤씨 윤확(尹確, 정정공 윤번의 아들 윤사흔의 현손)에게 출가한 딸 등이 있었다. 이 중 윤확은 정희왕후의 종고손이 되는데, 이지방의 아들 이광식의 딸은 또다시 윤확의 재종손인 윤강(尹綱)에게 시집간다. 윤강은 조선 중기의 권신 윤원형, 윤원로의 조카이자 이중경(李重慶, 광주인)의 장인이다.
13세 이지방(李之芳, 1466 ~ 1537)은 1489년 무과에 급제하여 성종 말에 북정부원수 이계동의 부관으로 출정하여 여진족의 목 6구를 베어와 성종실록에 등장한다. 이후 연산군 때는 이지방의 친척 중 한명이 내시라는 이유로 연산군이 쫓아내는 기사가 등장한다.<연산군일기> 연산군이 자신의 비밀을 아는 내시들을 통해 근친자들을 파면하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내시가 된 인물은 어느 할아버지의 아들인지 우계이씨 세보에는 등장하지 앟는?? 중종 때는 종성부사, 회령부사, 의주목사를 거쳐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지내고, 1513년에는 중종이 문정왕후와 재혼하자, 왕비 책봉 주청사로 명나라에 건너갔다.<중종실록> 이때 그는 종계변무(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된 것)도 겸해서 파견됐지만, 왕비 문정왕후의 책봉 고명(임명장)만 받아서 돌아온다. 다만 이지방은 중국 북경에서 대명회통, 그때까지 조선에 말로만 전하던 대명회통을 구입해서 돌아온다.
이지방은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여러번 여진족을 격퇴하여 중종실록, 대동야승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대동운부군옥에도 이지방의 이름이 나타나다.<중종실록,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대동운부군옥> 1518년에는 여진족 속고내를 토벌할 적임자로 천거되기도 했지만 사림의 반대로 출정하지 못한 기록도 등장하고, 1528년에는 명나라 황후가 죽자 진향사로 갔으나 발병하여 의주목사에게 통보하고 되돌아왔는데도, 무단히 되돌아왔다는 죄를 받고 사헌부, 사간원의 탄핵을 당해 한때 충청도 남포로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 답례로 보낸 선례통사 이순종이 13세 이지방에게 병으로 오지는 못했지만 마음이 가상하다며 명나라 황제의 선물을 전달하자 여러 차례의 논쟁 끝에 충청도 수안으로 이배되었다가 석방된다.<중종실록>
13세 이지방은 청송심씨 봉사 심안신(沈安信)의 딸, 경기도관찰사 망세당 심선(沈璿)의 손녀와 결혼하여 14세 광식(光軾), 딸은 변안(邊晏)에게 출가한 딸, 파평윤씨 윤확(尹確)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이지방이 무과에 급제한 이래 그의 후손들은 이광식(아들), 이전(손자, 광식의 아들), 이용(손자, 광식의 아들) 이복남(고손, 이전의 손자, 1555 ~ 1598), 이덕남(李德男, 1557 ~1592, 이전의 손자), 이인남(李仁男, 1559 ~ 1592), 이경여(李慶餘. 5대손, 1574 ~1636 이복남의 장남), 이태망(李台望, 7대손, 1653 ~1728, 이경여의 손자), 이봉래(李鳳來, 8대손, 1694 ~ ?, 이태망의 아들), 이봉수(李鳳壽, 8대손, 이복남의 아들 이경수의 증손, 1689 ~ ?), 이한경(李漢景, 13대손, 이태망 다른 아들 통덕랑 이봉지의 6대손), 이한경(李漢景, 13대손, 이봉래의 6대손) 등의 무과 급제자가 나타났다. 11세 경연의 자손들 중에서도 13세 이지방의 후손들이 특히 출세하여 각처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이지방은 이현상의 10대조가 된다.
14세 이광식(李光軾, 1493 ~1563)은 1516년 무과에 급제하여 종성부사, 회령부사로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방을 방비하였다.<중종실록> 중종실록을 보면 이광식은 한때 김해부사로 임명됐지만 변방이 급하다는 이유로 종성부사로 다시 부임하기도 했고, 여주 목사와 성주 목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1543년에는 자기 동료가 변장(邊將)들에게 살해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노략질한 여진족의 소굴에 쳐들어가 위문하고 돌아와 변장들을 처벌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또 1555년에는 전라도 해안가로 쳐들어와서 10진을 함락시킨 왜구들을 토벌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병란이 확대되는 것을 막았다. 이광식은 태화 이현상의 9대조가 된다.
14세 이광식은 함안이씨와 결혼, 함안이씨는 정국공신4등(靖國功臣四等)으로 평안도관찰사,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함안군(咸安君) 양간공(襄簡公) 이세응(李世應)의 딸이다. 함안이씨 부인은 충청도 남포로 유배된 시아버지 이지방이 풍증과 이질로 고통받고 있음을 직접 한문으로 상소문을 지어 올려, 시아버지의 유배지를 도성과 덜 먼 곳으로 옮겨 시아버지 병수발을 들기도 했다.<중종실록>
이계변 (李繼邊), 이감(李戡, 1516 ~ 1583), 이전(李晉+戈 또는 晋+戈 , 1517 ~ ?), 이용(李庸+戈, 1533 ~ 1591)의 네 아들과 파평윤씨 윤강(尹綱, 윤원형, 윤원로의 조카)에게 출가한 딸, 이춘림(李春林)에게 출가한 딸, 신호(申濩)에게 출가한 딸 등을 두었다. 이전은 무과에 급제했는데 충장공 이복남(李福男, 1555 ~1598)이 이전의 손자이다. 이용(李庸+戈)은 1555년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남도 절제사와 함경북도병마절도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는데 임진왜란 직후 후손에 대한 기록이 사라졌다.
15세 이감(李戡, 일명 李勘이라고도 한다)은 자는 언신(彦信 또는 彦愼)으로 이감은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경기도, 경상도, 황해도관찰사와 이조, 병조참판, 사헌부대사헌, 대호군에 이르렀다. 국조방목과 사마방목에 입격 기록이 나타나고, 중종실록, 명종실록,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등에도 행적이 나타난다. 그는 초반에는 인척인 윤원형, 윤원로 등의 편에 섰다가 나중에 명종이 윤원형의 세력 확장에 염증을 느끼고 자신의 처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을 중용하자 그의 편에 선다. 이감은 풍천임씨, 좌참찬 정헌공 임권(任權)의 딸이자 지중추부사 소간공 임유겸(任由謙)의 손녀와 결혼하여 아들 이성헌(李成憲, 1534 ~ 1601)과 딸 1명을 예천 윤씨(醴泉尹氏)와의 사이에서 아들 이희헌(李希憲), 이유헌(李有憲), 이의헌(李宜憲)과 안동인 권봉수에게 출가한 딸 등을 두었다. 이감은 이현상의 8대조가 된다.
16세 이희헌(李希憲, 1569 ~ 1651)은 인조 때 참소무원종공신 1등으로 정헌대부 동지중추부사 역 양천현령이다. 본부인 청주한씨는 일찍 죽어 양주군 각심리에 매장했다 하고, 후처는 금천장씨 사과 장득해의 딸과 재혼하여 아들 원빈(元賓)을 두었다. 이희헌은 그의 7대조가 된다. 6대조 이원빈(李元賓, 1603 ~ 1671)은 음서로 출사하여 통덕랑을 지냈으며<사마방목>, 통덕랑으로 재직 중 생원시에 합격하였다.<사마방목> 그의 장인인 전주이씨 충정공 이홍주(李弘胄)의 묘갈명에도 생원으로 나온다. 5대조 이경태(李慶泰, 1633 ~ 1691)는 생전에 관직은 없었고, 사후 증직으로 통훈대부 장악원정에 증직되었다.
고조부 이상우(李商雨, 1648 ~ 1731)은 자는 설지(說之) 또는 성택(聖澤)으로 효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을 지내고, 수계(壽階)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이 되었다. 수계는 수직이라 하여 노인직을 말한다. 이상우는 이필수(李必壽), 이익수(李益壽),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이인수(李仁壽)를 낳았는데, 이인수가 태화 이현상의 고조부가 된다. 그러나 이인수는 이성석(李成錫), 이명석(李明錫), 이원석(李元錫) 등의 아들을 두었으므로 아들 중 한명인 성석을 아들이 없는 형 이익수의 양자로 보낸다. 본생 증조부 이인수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사후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증조부 이익수는 사후 아들 성석의 출세로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조부 이성석(李成錫)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였고, 아버지 이한운은 늦게 출사하여 음직으로 장사랑과 승사랑을 역임했다.
가계 배경
그의 조상은 13대조 이경연이 강원도 강릉에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현재의 성남시 대장동과 서울시 서초구 원지동, 신원동, 내곡동 일대에 정착하였다. 그러다가 태화 이현상의 고조할아버지인 이상우가 다시 경기도 포천으로 터를 잡았다. 이상우의 처가가 포천인가를 찾아보고 수소문해봤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태화 이현상의 고조부 이상우가 어떤 이유로 성남을 떠나 경기도 포천에 정착했는가를 확인할 단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조실록을 보면 1728년 이인좌의 난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인물 중에 이익관(李翼觀), 이순관(李順觀)과 여흥민씨 민관효(閔觀孝)였다.<영조실록> 이익관과 이순관은 송곡 이서우(李瑞雨, 1633 ~ 1709)의 서자들이고 민관효는 송곡 이서우의 서녀 사위이다. 영조실록에 이익관 이순관을 "이서우의 첩자(妾子)"라 하고 "민관효의 처남"으로 지목한 대목이 나타난다.<영조실록> 이인좌의 난으로 관련자들이 사형당할 때 이익관 이순관, 민관효 등이 처형되고, 그 가족들은 평안도, 함경도 일대의 관비로 흩어졌다.<영조실록, 승정원일기>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있던 이홍관(李弘觀)이 60세가 넘은 나이에 서제와 서매제의 죄에 연좌되어, 본인은 모른다고 진술했음에도 주참(誅斬)되었다.<영조실록>
아마 이 무렵에 이상우도 성남을 떠나 포천에 정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화 이현상의 고조부 이상우는 송곡 이서우와 8촌 삼종형제간이다. 이감-성헌-길남(차남)-경항(차남)-송곡 서우(사남)이고 이감-희헌-원빈-경태-상우 이다. 따라서 이익관, 이순관 등의 화를 피해서 거처를 옮겼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상우의 세 아들 이필수, 이익수, 이인수는 돌림자인 관(觀)을 쓰지 않고, 수(壽)를 돌림자로 썼다. 이인좌의 난이 이상우와 그의 아들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미루어 짐작된다.
유년시절과 출신 배경
이현상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전하는 기록이 없다. 그는 풍양조씨 부인과 결혼하는데, 풍양조씨 부인은 조기영(趙基永)의 딸이다.<우계이씨 세보> 그런데 어느 연구에 의하면 부인 풍양조씨는 서출이었다 한다.
전북사학회에서 발행한 <전북사학 제 13집 (1990년 12월호)> 중 張舜順의, 朝鮮後期 通信使行의 製述官에 대한 一考察 60페이지를 보면 장순순은 풍양조씨 족보를 찾아 "태화 이현상의 장인 조기영(趙基永)의 3대조(증조부)인 상만(尙萬)이 성보(聖輔)의 서자였다."고 밝혔다.<전북사학 제 13집 (1990년 12월호) 60페이지> 장 교수의 언급대로 "국조방목이나, 그의 가계의 족보인 우계이씨 세보에는 그가 서자라는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었전북사학 제 13집 (1990년 12월호) 61페이지> "다. 태화 이현상은 서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가 서출 출신 여성과 결혼해야 했던데는 몇가지 요인이 작용했던 것 같다.
우계이씨 세보나 1984년판 대동보 갑자보, 1999년판 대동보 무인보에는 이현상이 서자라는 내용은 없다. 그렇다면 태화 이현상이 서출 출신인 조씨부인과 결혼했던 배경은 크게 세 가지로 유추할 수 있다. 1728년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13촌 서종조부들 때문에 집안이 한번 풍비박산이 났던 점, 태화 이현상의 5대조 이경태가 서출이었던 점, 태화 이현상의 7대조 이희헌이 서출일 가능성 등이 있다.
본래 사대부였는데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이익관, 이순관은 그에게는 13촌 서종증조부가 된다. 그의 고조부 이상우가 송곡 이서우와 8촌간이었으므로, 이서우의 서자 형제들은 그에게는 서종증조부뻘 되는 셈이다. 그가 태어난 것은 영조 48년인 1770년이었고, 그가 과거에 응시한 1790년대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지 70년이 지났을 뿐이었다.
두번째로는 이홍주의 서녀이다. 전주이씨 이홍주의 묘갈명을 보면 첩이 낳은 딸이 이원빈에게 시집가서 1남 2녀를 두었다고 나타난다. 이는 국조인물고에 수록된 내용으로, 조선 효종 때의 정승인 전주이씨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정종의 서자 덕천군 후생(德泉君厚生)의 6대손, 지봉유설의 저자 실학자 이수광의 손자, 1595 ~1671)가 쓴 충정공(忠貞公) 이천(梨川) 이홍주(李弘胄, 1562 ~ 1638)의 묘지명에 나타났다. 충정공 이홍주의 서녀가 그의 6대조 이원빈의 부인이다.
이를 해석하자면 "배위는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증 정경 부인(貞敬夫人)인데, 부사(府使) 증 이조 참판 구효연(具孝淵)의 딸이다. 자애롭고 청순한 자질로 어리석은 첩들을 너그럽게 대하였으며, 공보다 9년 앞서 사망하였다. 아들 이헌방(李憲邦)은 감찰(監察)을 지냈고, 딸은 찰방(察訪) 민성임(閔聖任)에게 시집갔다.
측출(側出)에게는 아들 딸 각각 하나 있는데, 아들 이안방(李安邦)은 생원이고, 딸은 생원 이원빈(李元賓)에게 시집갔다. 이헌방은 일찍 죽어 적자(嫡子)가 없고 서출에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 이지백(李知白)은 진사이고, 장녀는 대사성(大司成) 이행원(李行遠)의 첩이고, 차녀는 장선윤(張善潤)에게 시집갔다. 이원빈은 1남 2녀를 두었다." 가 된다.
백헌 이경석이 쓴 비문에 의하면, "側出男女各一男安邦生員女李元賓"이라 하여 이홍주의 측실 소생 1남 1녀 중 딸이 이원빈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이홍주는 정종의 서자 선성군 무생(宣城君茂生)의 5대손으로 1594년 별시문과에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이후 예조좌랑과 정랑, 의주부윤 등을 지내고 1624년에는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가담했다. 이후 병조참판, 지의금부사, 도승지 등을 거쳐 1636년 우의정이 되고 영중추부사를 거쳐 영의정에 이른 인물이다. 국조인물고 권52 우계, 율곡 종유 친자인(牛栗從游親炙人)에 수록된 내용으로, 1999년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다시 간행한 국역 국조인물고의 제4권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경석이 쓴 이홍주 묘비명이나 국조인물고에 수록된 원문에 의하면 17세 이원빈의 부인은 이홍주의 서녀라는 점이다. 태화 이현상의 6대조 할머니인 전주이씨는 충정공 이홍주의 서녀(庶女)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두 가지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이홍주의 서녀가 17세 이원빈의 첩일 가능성과, 이홍주의 서녀는 17세 이원빈의 정실 부인으로 이원빈이 서출일 가능성이다.
16세 이희헌(李希憲)은 두 번 결혼했다 그러나 본부인 청주한씨에 대한 기록은 미상이고, 두번째 부인은 금천장씨(衿川張氏)로 사과 장득해(張得海)의 딸이다. 이 금천장씨의 친정아버지인 사과 장득해에 대한 기록을 찾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이희헌의 두번째 부인 금천장씨(衿川張氏)는 1583년 7월 18일생이고 1636년 1월 26일에 졸하였다. 금천장씨의 아버지는 1540년에서 1560년 사이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이 부분은 후일 금천장씨에게 문의해봐야 할 부분이다.
그리도 두 번째는 15세 이감(李戡 또는 李勘)의 계비인 예천윤씨(醴泉尹氏)에 대한 것이다. 15세 이감(李戡 또는 李勘)의 계비 예천윤씨 부인은 예천윤씨 윤연수(尹延壽) 또는 윤정수(尹廷壽)의 딸이다. 그리하여 직접 예천윤씨인 분 몇 분에게 문의해보았지만 윤연수(尹延壽) 또는 윤정수(尹廷壽)라는 이름은 족보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우계이씨 세보에 의하면 이감은 1516년생이고 1583년에 졸하였다. 본부인 풍천임씨는 1515년 4월 12일에 태어나 1556년 2월 1일에 졸하였다. 한편 계비인 예천윤씨는 1538년 10월 28일생이고 1624년 11월 11일에 졸하였다.
현재로서는 단정짓기 어려우나 15세 이감(李戡 또는 李勘)의 부인 중 예천윤씨 부인이 윤연수(尹延壽) 또는 윤정수(尹廷壽)의 서녀이거나, 윤연수(尹延壽) 또는 윤정수(尹廷壽)가 서출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우선 문헌, 자료를 통해 확인된 점은 17세 이원빈(李元賓)의 부인 혹은 첩이 전주이씨 충정공 이홍주(李弘胄)의 서녀라는 점이다. 이원빈은 태화 이현상의 6대조이고, 이홍주의 서녀 전주이씨는 태화 이현상의 6대조모가 된다. 태화 이현상의 5대조 이경태(李慶泰, 1633 ~1691)의 생모가 서녀인 것이 기록에 나타난다.